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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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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애쓰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서 드러날 때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것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의 자연적 성품으로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나요? 하나님은 그 사람도 관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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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12-13)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율법적인 유대인들의 사랑은 무엇입니까?(43절)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44절)
  • 예수님 사랑은 어디로부터 기인합니까? (45절)
  • 아버지의 온전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48절)

– 너희가 들었으나(43절)
이스라엘은 하나님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여 이방인들에 매우 엄격했다. 그들은 결코 동정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진멸되어야만 했다(신7:2). 암몬이나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했다. 그들에게 평안과 형통을 구하는 것도 금기시 되었다(23:3,6). 한편, 레위기는 동족과 형제에게 복수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금한다(19:17-18). 이스라엘의 사랑은 한계가 명백했다. 사랑과 미움의 대상이 명확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로마를 포함한 이방인과 이에 부역한 동족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위배하는 이를 ‘하나님의 원수’로 여기고 ‘하나님의 원수는 곧 나의 원수’(시139:20-22)라고 보았다. 삭개오에 대한 증오(눅19:7), 스데반에 대한 사울의 반응(행8:1)은 이를 잘 보여준다.

너희 원수,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절)
예수님은 참 사랑을 보이신다. 진정한 사랑은 한계가 없다. ‘사랑은 결코 원수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의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원수들이 있다(마10:34).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원수의 행태와 존재 방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23:34, 행7:60 스데반의 기도 참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 받을 것이다(45절,엡5:1,빌2:15,요13:35,요일4:7-8).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 요3:16).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47절)
유대인에게 ‘인사’는 친절을 넘어 ‘평화의 전달과 기원’을 의미했다(마10:12-13, 눅10:5-6). 인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며, 구원과 행복을 유보시키는 것, 더 나아가 증오와 적대의 표시였다. 예수님은 46-47절에서 편애가 아닌 참사랑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 내는 사랑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할 만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을 받는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는 비로소 사랑할 만한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온전하라(48절)
성도에게 ‘온전함’은 윤리적 기준보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18:13).’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관계에서 정의되고 결정되어야 한다. 이는 행위와 의도,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 인간의 전인적인 측면 전부를 포함한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가? 계명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지키고 있는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온전히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하나의 계명으로 인해 낙심하고 뒤돌아서지 않는다(마19:21).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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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됨

오늘 묵상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규칙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에서 ‘온전함’이란 하늘 아버지를 따라 우리도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면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러한 좋고 싫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좌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함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 온전함의 중심에는 ‘관용’이 있습니다. 찰스 링마가 쓴 [본회퍼 묵상집]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녹슬지 않는 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고통을 당했고, 나치에 의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에서 본회퍼가 했던 말입니다.

“이곳은 교회이며, 하나님의 말씀 아래 유대인들과 독일인들이 함께한다.” 이런 내용이 그리스도인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와야 할 사람들을 포용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려내기를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는 의미를 함축하면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 즉 카톨릭 교인과 개신교인, 복음주의자와 은사주의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를 구분하는 데 능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진 종파의 꼬리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진실과 사랑, 연합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단지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일치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은 좋은 사람 또는 좋은 그리스도인의 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입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이 ‘자연적 애착’(natural affinities)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자연적 애착이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호감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감정에 의해 사람을 사귀는 것과 관용의 정도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애착이 가지 않는 사람들과도 교제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성도의 공동생활]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허락된 것은 전혀 자명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들 한복판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자들마저도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행악자와 조롱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완전히 홀로 남겨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수도원적 은둔 생활이 아니라, 원수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일과 사명이 바로 그곳에 있는 까닭입니다.


제자의 조건은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의 기준’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형제와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의 공동생활]을 조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을 때, 그와 동시에 우리도 형제에 대한 긍휼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심판 대신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이미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이제 우리는 형제들에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챔버스의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은 선을 행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선을 행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표현이 조금 어렵지만 챔버스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우리 안의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자체를 나타내려고 할 뿐, 경건해지려고 애쓰는 인간의 생명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초자연적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강조하는 것처럼, 이러한 삶의 비결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 아닌 구체적인 삶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변화산의 체험이 아닌 삶의 한가운데서 소용돌이치는 격랑 가운데 경험하는 평안함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소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소망 내가 바라는 한 분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한없는 사랑 풍성한 긍휼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예수 닮기를 예수 보기를 예수만 높이길 내가 원하네

내 평생 소원 예수 닮기를 예수만 닮기를 내가 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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