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보 QT MY 메뉴
이전으로
2021년 09월 22일 수요일
다음으로
이전으로
2021년 09월 22일 수요일
다음으로
주님은 나의 최고봉

순종할 이유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 13:13
video poster

한 줄 노트

  • 주님은 우리를 다스리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 순종은 사랑의 관계에서 다스림을 받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입니다.

묵상질문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그 다스림이 순종으로 인해 찾아왔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이사야 50:4-9 + 요한복음 13:13
펼치기/접기

(이사야 50:4-9)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요한복음 13:13)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 하나님은 여호와의 종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4절)
  • 이를 통해 무엇을 하게 하십니까? (4절)
  • 여호와의 종이 당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6절)
  • 그 모든 일에 초연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7-9절)

학자들의 혀,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4절)
‘학자(히, 리무딤)’는 ‘배우다, 본받다’를 기본 의미로 한다. ‘가르침 받는 사람’이란 의미로 볼 때 ‘제자, 학생’으로 읽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본문은 혀 보다 귀가 더 강조되고 있다(4-5절). 여호와의 종이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침마다 하나님으로 듣고 깨우치기 때문이다. ‘학자, 제자’는 단지 지식을 습득해 박식해진 이가 아니라 스승과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는 하나님과의 바른 인격적 관계 하에서 가르쳐 주신 말만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제자를 신임하신다.

깨우치시되, 알아듣게 하시도다(4절)
‘깨우치다(히, 우르)’는 ‘마음을 부추기거나 감동시켜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이성을 날카롭게 하시고 영성을 일깨우며 사명감을 북돋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강요하거나 굴복시키지 않으시고 ‘알아듣도록’ 제자들을 일깨우신다. 여호와의 종은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본을 보인다.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5절)
‘거역하다(히, 마라)’는 음식이 매우 ‘쓸’ 때 사용하는 단어다. 구약에서는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매우 ‘쓰라린’ 경우에 대부분 사용되었다. ‘뒤로 물러가다(히, 아호르 네쑤고티)’는 겁을 먹고 뒤로 도망치는 것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종이 감당할 사명이 만만치 않음을 나타낸다.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6절)
수염은 남성의 인격을 상징했다. 수염을 깎거나 뽑는 것은 매우 큰 치욕으로 형벌에 가까운 일이었다(삼하10:4, 느13:25). 침 뱉음 당하는 일은 수염을 뽑히는 일보다 더 드물고 더 굴욕적인 일이었다. 여호와의 종을 모욕하고 정죄하는 세상의 권력은 무한하지 않다. 옷이 해어지듯 언젠가 사라져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온다. 때로 좀 먹어 떨어지는 옷처럼 갑작스런 재난으로 망할 수 있다(9절).


◆ 묵상도움글
펼치기/접기

1. 주인 됨의 의미

어제 묵상을 통해 선교사로 부름 받는 것이 어떤 예정된 운명이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화로운 목적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일까요? 오늘 묵상에서는 ‘선교사’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사실은 선교사가 되기 위한 선행조건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인을 모시는 것과 지배받으며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모시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아시는 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묵상의 원제목은 “The missionary’s Master”입니다. 선교사의 주인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인은 우리를 가장 친밀하게 아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주 되심’의 특징은 순종을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늘 우리에게 순종의 선택권을 넘기는 것이죠.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의지’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많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우리가 따라간다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님이 우리를 다루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 두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강요도 방관도 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도움의 장소]에서도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된 스승은 자신이 스승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종종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강요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면 잘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코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절대로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어떤 수단도 사용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나의 부족을 채우시며 나의 불순종을 용서하신다. 만일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유함이 특징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한 가지만을 위한 자유임을 잊지 말라. 오직 주인께 순종하기 위한 자유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어진 ‘순종의 자유’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분의 다스림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2. 진정한 관계

오늘 묵상 본문 요한복음 13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요, ‘선생’이 되시느냐 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심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첫 번째 주제에서 이야기 했듯이, ‘주’라는 말은 우리가 단순히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 속에서 다스림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주 되심’을 이해할 때, 그것은 ‘순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지배가 아닌 사랑의 관계 속에서 ‘순종’이 나옵니다. 이러한 관계를 본문에서 히브리서 5장 8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이란 아버지와 아들처럼 동등한 관계에 기초합니다. 예수님은 동등하나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기초한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기꺼이 고난 받으시면서 순종하셨습니다. 이 관계에 대해 챔버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지배받는 것처럼 예수님을 대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관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는 의식이 없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챔버스가 말하는 진정한 관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지배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소유임을 믿기에 마땅히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 [예기치 못한 기쁨]에 이 놀라운 관계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나는 무슨 협박이나 약속 때문에 타락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거기에는 협박도, 약속도 없었다. 그분의 명령은 준엄했지만, 배후에 ‘제재장치’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그분께 순종해야 했다. … “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은 결국 “하나님이시니까”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그분의 주권이 법적으로 정당한 것임을 보여 준다.


C. S. 루이스는 자신의 회심 경험을 돌아보며 어떤 협박이나 회유 없이 하나님의 본질을 깨달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자체로 준엄한 권위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에 모든 것을 맡긴 후에 누리는 평안은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에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는 모든 결과에 초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환경을 조성하실 것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 뜻대로, 풍성하게도 가난하게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단 한 가지 일은 ‘그분은 나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로딩중...
0:00 0:00
닫기
1.0x
0.5 1.0 1.2 1.5 2.0
닫기

구독설정

구독한 콘텐츠는 MY구독에서 한번에 볼 수 있어요.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