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보 QT MY 메뉴
  • Home
  • >
  • QT
  • >
  • 바람과 풍랑을 바라봅니까?
이전으로
2021년 06월 18일 금요일
다음으로
이전으로
2021년 06월 18일 금요일
다음으로
주님은 나의 최고봉

바람과 풍랑을 바라봅니까?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가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 지라


마 14:29-30
video poster

한 줄 노트

  • 우리의 최선은 폭풍우 흑암 속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두마음’을 가지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사는 태도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오늘 어디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나요? 혹시 그것 때문에 당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요?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14:22-33
펼치기/접기

(마태복음 14:22-3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 제자들은 왜 배에 올랐습니까? (22절)
  • 예수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23절)
  • 제자들은 바다에서 어떤 일을 만납니까? (24절)
  • 제자들은 풍랑 가운데 누구를 봅니까? (25절)
  • 제자들과 베드로, 예수님의 반응(말씀)은 무엇입니까? (26,27,28-30,31절)
  • 배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33절)

제자들을 재촉하사(22절)
‘재촉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출발하기 전 제자들은 이미 항해 여건이 좋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풍랑 속으로 보내신다.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23절)
본문에는 3가지 주요 배경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산’으로 가신다. 구약에서 ‘산’은 하나님과 밀접히 접촉하는 장소이며 하산한 인물들은 이후 비범한 일들을 행했다. ‘바다’는 죽음과 혼돈을 상징한다. 제자들은 바다 위 ‘배’에서 고난을 당한다. 배는 종종 ‘공동체’로 상징된다.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24절)
‘리(里)’로 번역된 헬라어가 200미터 안쪽임을 감안할 때, ‘수 리’는 대략 1킬로미터 내외 정도 될 것으로 보인다. 돌아가기에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밤 사경(새벽 3-6시)이 될 때까지 제자들은 오랜 시간 풍랑과 씨름했다. 그 동안 예수님은 기도에 전념하셨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7-28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위를 보고 믿고 순종하여 물 위를 걸었다. 그럼에도 물 속에 빠져 들어간다. 성도들의 믿음이 얼마나 유동적이며 연약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앎, 의지, 소신과 상관 없이 상황에 흔들릴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32절)
바람은 스스로 잦아든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 의해 진압되었다. 어둠은 빛으로만 물러가고, 죽음과 혼돈은 주님으로만 제압된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바다를 정복하시고 지혜로써 ‘라합’, 혼돈의 세력을 깨뜨리신다(욥26:11-14). 풍랑을 제압하는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묵상도움글
펼치기/접기

1. 주님을 바라보는가?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장은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바다를 걸었던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풍랑은 실제적인 일이었습니다.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쳤고 배가 침몰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신기하게도 베드로는 바람과 풍랑을 고려하지 않고 주님만을 ‘인식’ (recognized)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보았을 때, 놀랍게도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걷게 된 것이죠. 그런데 막상 풍랑이 이는 바다위에 서자 베드로의 눈에 주님이 보이지 않았고,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적인 인간이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걷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다시 물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사실 주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파도 위에서 뿐 아니라 파도 밑에서도 걷도록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둘 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와 꼭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주님께 달려갑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께 달려가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형편들을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서 있으면서도 여지없이 물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오늘 묵상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풍랑과 파도는 언제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주눅이 들기 시작하면서 주님을 알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를 꾸짖으십니다. “왜 의심하였느냐?” 고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처한 실제 상황가운데서 주님을 계속해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께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바다 위를 걷게 하실 수 도, 파도 밑에서도 우리를 걷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참 많이 부르는 찬양 중에 ‘주님여!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 라는 곡이 있습니다. 우연히 어떤 글을 읽다 이 찬양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1900년대 미국 시카고에는 크리스천 음악인인 톰 도로시(Thomas A. Dorsey)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는데, 어느 날 차로 5시간 거리에 있는 세인트루인스의 한 교회에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아내는 임신 9개월로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건강상에 문제로 위험하다는 전보를 받게 됩니다. 한 참을 고민하던 그는 집회를 인도하고 시카고의 집으로 도착했는데, 이미 아내와 아이는 숨을 거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왜 주님’ 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주의 말씀을 증거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갔는데 ‘왜죠?’ 라는 질문은 수개월간 그를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그를 위해 기도하던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한 학교의 캠퍼스를 걷게 됩니다. 그 날은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교정을 걷다 선명하게 새겨진 글씨를 보게 됩니다. ‘take my hand, precious Lord’라는 문장이었죠. 그는 바로 가까운데 있는 피아노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예수여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어렵고 고난이 겹칠 때 예수여 날 인도 하소서

외치는 이 소리 외면치 마시고 예수여 날 인도 하소서.


2. 따지지 말고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주님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순종한 다는 것이지, 주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래, 정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일까?’라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조금도 주저 없이 당장 주님께 자신을 던지십시오.”


때로 주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미세한 음성이라도, 그 음성에 응답해 자신을 내 던진다면 더욱 명확하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작은 순종이 더 큰 순종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관념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따지고 있다면 실제로 순종할 의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주님은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1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작은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질책하신 것입니다. ‘작은 믿음’ 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도합 다섯 번 사용되고 있는데, 모두다 제자들을 질책하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 30절과 8장 26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이 말씀들이 제자들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큰 믿음을 가져야 할 자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데 대한 책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31절 말씀 가운데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에 보니,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14:31 왜 의심하였느냐(에이스 티 에디스타사스). ‘의심하였느냐’에 해당하는 ‘에디스타사스’의 원형 ‘디스타조’는 ‘두 번’ (막 14:30,72)이란 뜻이 있는 ‘디스’에서 유래하여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는 처음 생각이나 각오를 버리고 중간에 방향을 선회한 경우에 해당된다.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단어인 ‘디아크리노’가 따로 있음에도(21:21 ; 막 11:23 ; 행 10:20) 본문에서 특별히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예수를 향한 시선을 바람에 빼앗긴 베드로의 상태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우리가 처한 실제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을 계속 인식하며 온전하게 주 만 의지하십시오.”


‘믿음’과 ‘의심’의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본문의 의도와 챔버스의 묵상 포인트가 잘 이해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는 예수님만 온전히 바라보았지만, 시선을 빼앗기는 ‘두 마음을 품은 상태’가 되자 물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로딩중...
0:00 0:00
닫기
1.0x
0.5 1.0 1.2 1.5 2.0
닫기

구독설정

구독한 콘텐츠는 MY구독에서 한번에 볼 수 있어요.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