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보 QT MY 메뉴
  • Home
  • >
  • QT
  • >
  • 대리적 중보 기도
이전으로
2021년 05월 04일 화요일
다음으로
이전으로
2021년 05월 04일 화요일
다음으로
주님은 나의 최고봉

대리적 중보 기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19

(PrayOn 기간에는 5시 30분에 오픈됩니다)

video poster

한 줄 노트

  • 진정한 중보 기도는 동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지금 누군가를 위해 하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도 흡족한 기도일까요?


묵상 레시피

◆욥기 38:1-3, 40:1-5, 42:1-6 + 히브리서 10:19
펼치기/접기

(욥기 38:1-3, 40:1-5, 42:1-6)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히브리서 10:19)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하나님이 나타나 욥에게 하신 첫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38:1-3)
  •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와과정,신비를 펼쳐 욥에게 말씀하십니다(38:4-39장).
  • 질문의 답을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40:1-2) 욥은 어떻게 답했습니까? (3-5절)
  • 하나님은 다시금 창조하신 존재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40:15-41장).
  • 욥은 결국 무엇을 깨닫고 고백하게 되었습니까?(42:1-6절)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1, 42:3)
‘무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뻴리 다아트’이다. ‘뻴리’는 없음, 존재하지 않음,‘다아트’는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된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은 욥과 지인들의 경험, 영적 체험, 지혜전승을 기반으로 한 말들을 ‘무지’하다고 일축하신다. 전혀 무가치하거나 진정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생각’(이치, 히, 에차)에 쓰인 히브리어는 단순히 세상 돌아가는 순리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뜻, 목적, 하나님의 의도를 뜻한다. 즉, 그들의 논쟁은 하나님의 계획과 방책, 목적을 흐리게 한 것이었다.

트집 잡는 자가(히,잇쏘르),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히, 모키아프, 48:2)
트집 잡는다는 표현에 쓰인 히브리어 잇쏘르는 ‘바로잡는 자, 교정자, 책망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탓하는 자’에 쓰인 ‘모키아프’는 ‘논증하다, 설복시키다, 유죄를 입증하다’란 의미이다. 하나님은 나신의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교정하려 하고 하나님의 ‘잘못’을 입증하려 한 욥의 태도를 지적하신다.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이 문장에 쓰인 ‘니라오트’는 절대적 부정의 의미를 지닌 ‘로’, ‘이해하다’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삔’과 연결되어 있다. 욥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입에 담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토로한다. 인간의 인식으로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귀(히, 오젠)는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라 ‘매개체’를 통해 인식한 하나님이다.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믿음이다. 눈(히, 아인)으로 주를 뵌다는 뜻은 ‘주시하다, 생각하다, 분별하다, 경험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 욥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한다.


◆ 묵상도움글
펼치기/접기

영적 완고함에서 벗어나야 함

우리는 어제 묵상을 통해 ‘동정심’이 중보 기도의 장애물임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런 동정심의 배후에 도사린 ‘영적 완고함’의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으로 주님께 나아가 요구하는 것을 중보 기도라 착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정심’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 것입니다.”


‘영적 완고함’은 우리가 중요하게 다뤄야 할 중보 기도의 장애물입니다. 영적 완고함은 우리로 하여금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신앙의 출발점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용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선하고 덕스러운 것을 바라보면서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 완고함’입니다. 영적 완고함이 ‘죄’가 아닌 ‘선한 마음’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완고함’은 우리를 ‘영적 무관심’으로 인도하고, 곧 ‘영적 나태함’에 이르게 합니다. 챔버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합니다.”


챔버스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기도는 결국 남을 불쌍히 여기는 자신의 인격만 돋보이게 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로 중보 기도를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내 생각을 고집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기도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일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중에 나의 뜻과 관심이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김형국 목사님이 쓴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주기도문]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잘못된 기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챔버스의 글과 맞물려 있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가르치려 듭니다. 지금 뭘 하셔야 하는지, 무엇이 최우선인지를 하나님께 알려 드리려 합니다. "하나님, 지난번에 말씀드렸는데 아직 그대로잖습니까?" "주님, 잊으셨나요?" "이러시면 안 되죠. 지금 이런 상황인데 이렇게 개입해 주셔야죠." 추궁하기도 하고 독촉하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교육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잊어버린 기도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깊어져 갑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가지는 동정심과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가지셨던 관심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그것과 동일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기도의 분량이 많아져도 근본적인 관심이 변하지 않으면 여전히 세상의 삶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양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프랭크 루박의 중보기도]에서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기도가 중보 기도에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바뀌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옳으십니다. 반면 인간은 다분히 옳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8-9절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제 조금씩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깊이와 넓이, 높이를 따라 우리도 변해 갑니다.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 오늘 묵상 제목이 ‘대리적 중보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챔버스에 의하면,

“대리적 중보 기도란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인간적인 연민을 버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영적 완고함에서 벗어나 진정한 ‘대리적 중보 기도’를 위해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인간적 연민을 고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관심으로 대치되었습니까?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면 완전합니까?

우리는 중보 기도를 하며 불만이 가득합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충만합니까?

우리는 중보 기도를 우리의 생각과 방식대로 합니까? 아니면 주님과 일치된 관심을 갖기로 결심했습니까?

로딩중...
0:00 0:00
닫기
1.0x
0.5 1.0 1.2 1.5 2.0
닫기

구독설정

구독한 콘텐츠는 MY구독에서 한번에 볼 수 있어요.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