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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구원, 하나님의 위대한 생각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벧전 4:17

(PrayOn 기간에는 5시 30분에 오픈됩니다)

video poster

한 줄 노트

  • 우리는 감정이나 체험이 아닌 복음 그 자체를 전해야 합니다.
  •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믿을 때 담대하고 단순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묵상질문

복음을 전할 때 우리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혹시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13:1-9 + 베드로전서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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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1-9)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베드로전서 4:17)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 씨를 뿌리는 자는 어떤 곳에 씨를 뿌렸습니까? (4-8절)
  • 씨는 각각 어떤 운명을 맞이했습니까?(4-8절)
  •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어떤 결실을 맺었습니까? (8절)
  • 씨의 운명은 무엇에 의해 좌우됩니까?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3-8절)
씨 뿌리는 사람은 밭을 가려 씨를 뿌리지 않았다. 왜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씨를 뿌린 이후에 밭을 가는 경우들도 있었다. 아직 기경되지 않은 밭에는 굳은 땅, 돌들이 있었을 것이다. 혹은 영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밭’에도 ‘열매’가 나길 바라며 동일한 ‘씨’를 뿌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씨의 운명’이다. 결실을 맺는가 맺지 못하는가? 씨를 뿌리는 사람도, 씨도 동일하다. 씨의 운명은 ‘환경’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환경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적인 관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간의 응답, 반응들 속에서 결정된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8절)
백 배의 결실이나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은 땅 모두 ‘좋은 땅’으로 언급된다. 달란트의 비유처럼 ‘좋은 땅’은 가시적인 양이나 정도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씨앗이 반드시 결실을 맺는 씨앗이며, 열매를 맺게 되면 30배 이상의 풍성한 수확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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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

오늘 묵상은 챔버스가 성경훈련대학 설교 수업 시간에 가르쳤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묵상할 때, 설교자가 되기를 열망했던 학생들이 이 말을 어떤 자세로 들었을지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보면 어떨까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설교자는 ‘무엇을 설교할지?’가 어렵고 두렵습니다. 챔버스는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할 때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꼭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위대한 생각이지 사람의 체험이 아닙니다. 체험은 단지 구원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혹시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체험’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은 구원 받았음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지만, 체험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하는 것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종종 개인의 체험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신의 체험으로 복음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무서운 시도입니다. 어떻게 지옥에 가지 않고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살지 고민하며 선포하는 것은 설교자들이 중요하게 다뤄야할 문제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심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무섭다고 선포하기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기 위해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두려움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하나님께 나아오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그대로 제시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나타나실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영이 일하실 것을 믿으며 우리가 믿는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2. 성령께서 하신다

우리가 흔히 복음을 ‘제시’한다고 말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단순히 복음을 ‘제시’하면 복음이 역사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의 역사입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역할과 성령님의 역할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설교자는 복음을 제시하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설교자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인가요?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의 자리까지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각 사람을 만나주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4장 17절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심판의 때’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우리가 잘 지켰는지, 지키지 못했는지 심판하십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지킬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주님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또한 우리가 순종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무언가 고려하지 못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계시다는 말도 옳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은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에 나오는 불평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아래 우리의 생각은 온전히 죽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나 자신의 완전한 연약함을 인식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방식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젊은 여인이 공중전화 박스에 갔다가 문이 열리지 않아 한참 동안 소동을 벌인 일이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있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열려고 애써도 헛수고였습니다. 기진할 대로 기진한 여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전화국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급히 달려온 전화국 직원이 단 1초 만에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여는 데는 기술도, 아무런 열쇠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공중전화 박스 문은 안으로 잡아 당겨 여는 것인데 당황한 여인이 밖으로만 밀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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